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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경희궁] 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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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271호 / 1617(광해군9)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조선시대 5대 궁궐 중의 하나인 경희궁은 말로만 들었지 생소하고 낯선 공간이다. 경복궁창경궁창덕궁덕수궁은 자주 가보기도 하고 차로 지나치기도 해서 낯설지 않지만 경희궁 하면 떠오르는 위치며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이유를 가보고 나서야 알았다. 

위치를 정확히 몰라서 검색해보니 서울역사박물관 뒤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온다. 일단 거기까지 가면 바로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경희궁은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으로 주차장이 자리잡고 있었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니 그 끝에 있었다. 길을 잘몰라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간 경우였다. 광화문쪽에서 역사박물관 정문을 조금 지나면 경희궁의 정문이 나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가끔 그 앞을 버스로 지나가기는 했는데 그곳이 경희궁 정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안내도를 살펴봐도 예전 궁궐의 일부분만 남았고 그것도 복원된 건물뿐이었다. 경희궁은 일제에 의해 거의 파괴되어서 더이상 궁궐로서의 규모를 많이 상실한 상태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지 않아서 그런지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렇듯 일제에 의해 파괴된 궁궐은 우리에게 낯선 공간으로 다가왔으며 큰길에서도 한참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 존재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다른 궁궐과 같은 위상을 찾으려면 문화행사와 연계해서 많은 사람들이 경희궁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


경희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 가운데 한 곳이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지만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데 이 말과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승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으로 융복전과 회상전이라는 두 개의 침전이 있었으며, 흥정당과 장락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궁에는 정문인 흥화문이 있고 동쪽에는 흥원문, 서쪽에는 숭의문, 남쪽에는 개양문, 북쪽에는 무덕문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적각들이 철거하여 이전되었고 궁역이 축소되어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을 잃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숭정문

숭정문 돌계단 장식

숭정문 현판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 경희궁 창건 공사 초기인 1618(광해군10)경에 건립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승정전 건물을 일본의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의 승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숭정전 현판

숭정전 내부

자정문

자정전

경희궁의 편전, 1617~20(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헐어 내었던 것을 서울시에서 발굴하여 확인한 자리에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자정전 현판

자정전 뒤편

서암 앞에서 자정전과 태령전

서암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岩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령전 기와

태령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영조 20)에 이곳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태령전 현판

영조 어진

경희궁에서 살았던 왕은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물렀던 왕은 영조이고, 경희궁에서 태어난 왕은 숙종이다. 숙종은 13년 동안 경희궁에서 지냈으며,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1625년 경현당에서 행해진 소현세자 관례를 시작으로 경종과 정조가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숙종과 헌종의 가례가 치러졌고, 숙종을 비롯하여 영조와 순조 등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숙종부터 정조 즉위까지 경희궁은 최전성기였으며, 왕을 비롯해 왕비와 후궁 등이 생활한 일상공간이었다. 인현왕후, 희빈 장씨, 혜경궁 홍씨도 경희궁에 살았던 대표적인 왕족이다.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종로구 2013-24)

느티나무(약 380년) / 둘레 380cm, 높이 19m / 경희궁내

경희궁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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